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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참사가 만든 기념물: 'The Monument'의 과학과 상징

by pabal5 2025. 6. 11.

런던 대화재 이후 세워진 'The Monument'는 단순 추모비를 넘어 과학과 도시계획이 결합된 복합 기념물이다. 그 역사와 상징을 되짚어 본다.

1666년 런던 대화재는 무려 4일간 이어지며 도시의 중심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재난은 단지 복구를 넘어, 도시 재생과 기억, 과학적 실험의 상징이 될 조형물을 탄생시킨다. 바로 '더 모뉴먼트(The Monument to the Great Fire of London)'이다. 단순한 추모비를 넘어 도시와 시민을 위한 과학적·건축적 기념물이 된 이 구조물은 어떤 철학과 기술을 담고 있을까?

 

 

기념물의 배경: 단순한 추모를 넘어서

대화재의 진원지였던 퍼딩 레인(Pudding Lane) 근처, 런던 브리지 서쪽에 세워진 이 기념물은 찰스 2세의 명령으로 착수되었다. 런던을 재건한 천문학자이자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과 로버트 훅(Robert Hooke)이 설계했으며, 1677년 완공되었다.

높이는 정확히 202피트(약 61.57m). 그 이유는 화재가 발생한 퍼딩 레인에서 이 기념물이 위치한 지점까지의 거리가 바로 202피트이기 때문이다. 즉, 기념물 그 자체가 화재의 시작점까지의 거리 측정 도구이자 지리적 상징으로 설계되었다.

런던 대화재 기념비 'The Monument'과 그 뒤편의 불길과 교회를 묘사한 그림
런던 대화재 기념비 'The Monument'

과학이 담긴 건축물: 거대한 측정 기기

모뉴먼트는 단지 기념탑이 아니다. 내부는 중앙에 뚫린 직경 약 1m의 원통형 관(shaft)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문관측과 중력 실험을 위한 공간으로도 설계되었다. 이는 크리스토퍼 렌과 훅이 이 기념물을 과학 실험을 위한 도구로도 사용하기 위해 고안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관 안에서 진자 실험, 낙하 실험, 대기압 측정 실험 등이 이루어졌으며, 내부의 311개 나선형 계단은 이 기념물이 과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열린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건축양식과 상징 구조

외형은 도릭 양식의 석주(column) 형태이며, 꼭대기에는 원래 화염 모양의 청동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불꽃을 상징하며, 불길 속에서 부활한 도시 런던을 표현한 것이었다.

기단부에는 라틴어로 된 3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하나는 화재의 발발과 피해, 다른 하나는 국왕의 재건 노력, 마지막 하나는 런던의 부흥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 기념물이 권력, 시민,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물임을 뜻한다.

추모, 과학, 도시의 경계를 넘나든 기념물

The Monument는 전통적인 전쟁 영웅이나 왕을 기리는 조형물과는 달리, 도시 전체의 희생과 부흥을 기념하는 점에서 독특하다. 또한 도시 중심부에 세워져 시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이는 도시가 기억을 어떻게 공유하고 구성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구조물이 도시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계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재건된 런던의 도로와 건물들은 모뉴먼트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이는 도시 중심 상징물의 활용이 단순 장식에서 실질 설계 요소로 확장된 사례다.

 

 

현대 도시에서 모뉴먼트의 역할

오늘날에도 우리는 세월호 기억의 벽, 9·11 메모리얼, 광주 5·18 민주광장처럼 대형 재난이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도시에 배치한다. 이들 대부분은 단순한 추모의 기능을 넘어, 교육, 치유, 공동체 회복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 시작이 된 런던 모뉴먼트는 추모 + 과학 + 도시계획이라는 3요소를 결합시킨 최초의 복합 기념물이라 할 수 있으며, 전 세계 모뉴먼트 디자인의 원형 역할을 한다.

기억을 설계하다

재난은 사라져야 할 일이지만, 그 기억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The Monument는 불타버린 도시 위에, 그 기억을 높이 세운 구조물이다. 오늘날 도시가 갖는 기억의 방식, 공간의 배치, 조형물의 의미는 모두 이 한 탑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