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은 조선 초기의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여섯 임금을 섬기며 45년간 관직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문학적 재능과 학문적 업적은 당대 중국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서거정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거정(徐居正)은 1420년에 태어나 1488년에 생을 마감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그의 본관은 달성(達成)이며, 자는 강중(剛中)과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과 정정(亭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거정의 아버지는 안주 목사를 지낸 서미성(徐彌性)이었고, 어머니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대학자였던 권근(權近)의 딸이었습니다.
서거정의 관직 생활은 1444년(세종 26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사재감 직장을 시작으로 다양한 관직을 거쳤으며, 1451년(문종 1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현전 박사, 부수찬, 응교 등을 역임했습니다. 이후 그의 관직 생활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1456년(세조 2년)에 서거정은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이듬해에는 문신정시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그의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고, 1460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의 학자들과 문장과 시를 논하며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습니다.
서거정의 관직 생활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1464년에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직책으로, 당시 그의 학문적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후 그는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 등을 거쳐 1470년(성종 1년)에는 좌찬성에 올랐습니다.
서거정의 학문적 업적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는 시문을 비롯한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시화(詩話)의 백미로 꼽히는 <동문선(同文選)>과 설화집인 <필원잡기(筆苑雜記)> 등을 남겼습니다. 이를 통해 신라 이래 조선 초에 이르는 시문과 산문 문학을 집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문학 외에도 서거정은 여러 분야에 통달했습니다. 세조 때에는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했고, 성종 때에는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다방면의 업적은 그가 단순한 문인을 넘어 종합적인 학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서거정의 문장 실력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1460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그는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국(安南國)의 사신이자 명나라 과거에서 장원을 했던 양곡(梁鵠)이란 인물을 만나 시문을 겨루었습니다. 당시 양곡은 서거정의 문장을 보고 '천하의 기재(奇才)'라며 탄복했다고 합니다.
서거정은 22년 동안 문형(文衡)의 지위에 있었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주관했습니다. 이는 그가 조선 초기의 관학(官學)을 대표하는 학자-관료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이러한 이력에 걸맞게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여러 학자들과 공동으로 편찬한 저술로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경국대전(經國大典)>,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 등이 있습니다.
서거정의 마지막 관직 활동은 1487년(성종 18년)에 있었습니다. 당시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했을 때 서거정이 박사(博士)가 되어 <논어(論語)>를 진강했습니다. 이듬해인 1488년에는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 등이 왔을 때 서거정이 이들을 맞이했는데, 당시 문장가로서 서거정의 명성이 중국에 널리 퍼져 있어 중국 사신들이 그를 대할 때마다 항상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1488년(성종 19년) 12월, 서거정은 69세의 나이로 사저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시호는 문충(文忠)인데, '문(文)'은 학문의 폭이 넓고 견식(見識)이 많다는 뜻이며, '충(忠)'은 임금을 섬길 때 절의를 다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의 생애를 잘 요약해주는 시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거정의 영향력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경상도 대구의 구암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현재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서가정역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서거정의 업적과 영향력이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서거정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면, 그가 조선 초기의 문화와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문학적 재능, 학문적 깊이, 그리고 관료로서의 능력은 당대에 높이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거정의 삶은 학문과 관직의 조화, 그리고 국가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서거정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인물을 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업적과 정신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 국가에 대한 헌신, 그리고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 등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서거정의 삶을 통해 우리는 개인의 재능을 어떻게 사회와 국가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학문과 실무 능력을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거정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의 삶은 학문과 관직의 조화, 국가에 대한 헌신, 그리고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 등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의미 있는 가치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서거정의 삶을 통해 개인의 재능을 어떻게 사회와 국가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학문과 실무 능력을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거정의 업적과 정신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